일시 및 장소: 2002.3.5. 분당의 카페 [리체(Lee Che)]
질문: 신현준
정리: 신현준
데뷔 앨범을 발표한 시점에서 들국화는 '록 밴드'가 아니었다. 아니 적어도 완전한 형태의 록 밴드는 아니었다. 단적으로 들국화 1집 앨범(1985)에 나온 네 명의 멤버 사진 가운데 드러머가 없다. 드러머 없는 록 밴드가 있을까. 따라서 들국화의 음악이 '한국 록'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미스터리를 해명해야 한다.
그 해명이 어렵지는 않다. 1집 앨범의 레코딩 세션에서 드럼을 연주했고 그 뒤 들국화의 정규 멤버가 된 주찬권(1955년생)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1998년 들국화가 재결성되어 느슨하게 활동하는 지금까지 그는 '3인조 들국화'의 정규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주찬권은 들국화의 주축인 전인권, 최성원과는 또 다르다. 간단히 말해 전인권과 최성원이 '통기타 포크'의 후예라면, 주찬권은 '그룹 사운드'의 후예다.
이 점은 들국화에 가담하기 전 그가 이끌었던 밴드 믿음소망사랑의 음악을 들어보면 확인할 수 있다. 들국화의 음반과 공연에 세션으로 참여했던 최구희 등과 함께 그는 '한국적 록'을 추구했다. 신중현에 의해 착수되었지만 마치 숙제처럼 남아 있는 미완의 프로젝트 말이다. 말하자면 그는 '신중현 계보'에 속한다. 뒤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 이런 계보의 연(緣)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밀접했다. 들국화에서 발생한 '시너지 효과'는 그저 우연인 것은 아니었고 '역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주찬권은 들국화의 해체 이후에도 믿음소망사랑의 2집 앨범,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네 장의 솔로 앨범 등을 남겼다. 최근작은 모든 악기를 혼자 연주한 '원 맨 밴드'로 제작한 앨범이었다. 그렇지만 전인권과 최성원이 솔로 아티스트로도 어느 정도 주목받은 반면, 그의 작품들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여러 차례 라이브 클럽을 운영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게다가 들국화의 최근의 활동도 뜸한 편이다.
그래서 한국 록의 최고봉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일컬어지는 들국화의 멤버는 오랫동안의 곤경에 시달려 온 모습으로 나타났다. 물론 특유의 낙천적인 웃음은 잃지 않고 있었다. 분위기가 궁상스러워질지 모르니 이런 이야기는 잠시 접자. 들국화의 라이브 앨범(1986)에서 전인권이 주찬권을 소개하는 말을 들어보면서 분위기를 바꿔 보자. "열네살 때부터 무대에 섰고 여러 악기를 다루는 천재형 뮤지션이고. 기타 치고, 드럼 치고, 노래 하고 노래 만들고....드럼을 맡고 있는 주찬권입니다". 그가 어려서부터 무대에 섰던 이야기, 여러 악기를 다루었던 이야기부터 인터뷰를 시작했다.
장충단 공원의 북 치는 소년부터 용궁다방의 하드 록 정키까지
Q: 먼저 기타나 드럼 같은 악기를 배우게 된 과정부터 설명해 주십시오.
- 기타를 배운 건 다섯 살 때부터 친형한테 배웠어요. 그때는 학원 같은 것도 없어서 우리 형이랑 내가 10년 정도 나이 차이가 있는데 중학생 형들이 기타를 배우러 많이 다녔죠. 처음에는 통기타로 시작했고, 앰프 기타는 구하기 힘들어서 청진기 같은 마이크를 붙여서 다녔어요. 그게 국민학교(초등학교) 때니까 1961년, 1962년 정도예요. 그때 벤처스 곡들 "Sanghaied Twist", "Jango", "Apache" 이런 거 연주하고 그랬죠.
Q: 어려서부터 무대에 섰다고 들었는데요.
- 뭐 동네에서 아는 형들 쫓아다니면서 논 거예요. 그 형들이 프로로 음악을 한 건 아니지만 그때는 대부분 퍼스트 기타, 세컨드 기타, 베이스 기타 이렇게 해서 그룹을 했잖아요? 그런데 드럼이 없으니까 "야, 너는 드럼 배워서 우리 팀 같이 하자"고 해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그 형들이랑 그룹을 했다니까요. 그때 내가 살던 동네가 장충단 공원 근처인데 그때는 지금 있는 신라호텔같이 높은 빌딩이 없어서 놀기 좋은 공터였어요. 그래서 동네 애들을 모아 놓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놀고 그랬죠. 드럼 세트를 설치할 수는 없으니까 그냥 오픈 심벌 하나 꽂고 스네어 하나 두고 쳤죠. "해뜨는 집(The House of the Rising Sun)" 같은 거 '당다당 당당..'하면서...
Q: 동네 형들끼리 아마추어로 음악을 한 것 말고 프로로 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덧붙여 1960년대 말에 한참 그룹 사운드 붐이 일었는데 그 현장을 보신 것은 있으신가요? 음악 다방이나 생음악 살롱 같은 곳...
- 그때 광교에 가면 태평양이라는 곳이 있었어요. 음악 다방인데 라이브를 했었고, 그때 25시 같은 팀도 나왔고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지만 굉장한 팀들 많이 나왔어요. 라스트 찬스가 연주하는 것도 본 적 잇고.. 그리고 1969년에 (최)이철이 형 그룹이 장충체육관에서 공연하는 것도 봤어요. 아이돌스라는 이름으로 나온 것 같은데, 기억나는 게 이 형이 무대에서 기타를 집어던지더군요. "야, 저 사람 봐라. '오방'인데 "라고 생각했죠. 나는 그때 지미 헨드릭스를 몰랐는데 이철이형이 빨랐던 것 같아요. 내가 프로로 음악을 하게 된 건 1971년부터인데, 본격적으로 한 건 1973-4년경이에요. 그 전에도 여기저기서 드럼 치고 연주했어요.
Q: 그 당시 키 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나 히 식스의 "초원" 같은 곡은 가요로도 어느 정도 히트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그룹 사운드 히트곡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나요?
- 그런 곡들은 다 알았죠. 그렇지만 아무래도 악기 연주인의 길을 가려다 보니까 외국의 록 음악에 더 끌리게 되었죠. 나는 초등학교 1, 2학년 때부터 이미자, 남진, 나훈아의 뽕짝을 포함해서 다 띠었으니까 웬만한 곡에서는 다 아는 리듬만 나오니까 별로 끌리는 게 없었죠.
Q: 드럼 연주인으로서의 경력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여쭤 보겠습니다. 방금 1973-4년경부터 본격적으로 프로로 활동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전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 1970년대 초인가 그때 이태원에 가면 세븐 클럽, 럭키 클럽, 킹 클럽 같은 데서 김광석, 이중산을 비롯해 여러 음악인들이 연주하고 모이고 그랬어요. 김광석은 세븐 클럽, 이중산은 럭키 클럽에서 연주했고, 나도 그땐 킹 클럽에서 기타를 쳤었죠. 이건태(현 위대한 탄생의 드러머)씨나 한춘근(전 백두산 드러머)씨도 가끔 럭키 클럽에서 연주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 전에는 미8군 무대에도 좀 있었죠. 그때 삼각지나 이태원에는 밴드들 재워주는 여관이 있었어요. 거기서 숙식하면서 오픈 밴드도 하고 하우스 밴드도 하고 그랬죠. 오픈 밴드라는 건 TO가 생기면 하루는 평택, 하루는 의정부, 하루는 문산 식으로 가는 거고, 하우스 밴드는 한 달은 문산, 한 달은 동두천 이런 식으로 미군 부대 내의 클럽에 고정 출연하는 것이었죠. 1975년 여름에 키보드 치는 김청산(전 위대한 탄생)씨와 함께 하우스 밴드를 해서 문산 미 8군에서 연주했는데 그때 그룹 이름이 영 캣(Young Cat)이었나 그래요. 1973년 겨울쯤 이름이 드림 보우던가 하는 동두천의 한 클럽으로 연주하러 가니까 유현상씨의 그룹이 연주하고 있었어요. 유현상씨의 그룹이 끝나면 우리가 들어가서 연주하고 맞교대로 한 셈이죠. 그때 유현상씨를 처음 봤는데 그때는 기타리스트였죠. 우리나 (유)현상씨 그룹이나 딥 퍼플(Deep Purple), 그랜드 훵크 레일로드(Grand Funk Railroad) 같은 하드 록을 주로 연주했습니다.
Q: 그러면 벤처스나 애니멀스 같은 곡을 연주하다가 하드 록 같이 좀 '센' 음악으로 가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요?
- 그때도 산타나(Santana)나 C.C.R.같은 밴드는 일반적으로 음악 좋아하는 애들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레드 제플린, 지미 헨드릭스, 도어스, 킹 크림슨, 예스 같이 '완전히 가는 음악' 들은 건 1972년 정도예요. 그때 명동에는 예스(Yes)니 록(Rock)이니 이런 데서 이런 음악을 틀어주었죠. 나는 그때 수유리 쪽에 살았는데 그 동네에 음악 다방이 하나 있었어요. 그 음악 다방 운영하는 형이 이렇게 맨 '골진' 음악만 때리는 거예요. 그 형 덕분에 이런 음악을 많이 들었죠. 지금 생각하면 그 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Q: 그 음악 다방 이름은 무엇이었나요?
- 용궁 다방. 그 이름은 기억나네요(웃음).
명동, 종로, 이태원, 신촌 그리고 전국을 돌아다니던 고수(鼓手)
Q: 음악 스타일이 변하면서 드럼 패턴도 많이 바뀌는데 이건 어떤 음악 영향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을까요?
- 아무래도 레드 제플린이죠. 블랙 사바쓰나 킹 크림슨 경우도 드럼이 굉장히 고단위의 테크닉이 필요한 것이었어요. 단지 리듬 맞춰주는 정도가 아니었고 이 정도 감이나 테크닉을 갖추기는 힘든 것이었죠. 사실 그 전에 내가 처음 연습할 때는 왼손으로 스틱을 잡는 게 록 드럼에서 잡는 것과 달랐어요. 스윙 같은 것도 고단위까지 연습했죠. 그런데 그룹을 하니까 그런 게 다 필요 없더군요. 그룹으로 어느 정도 함께 하다 보면 인간적인 면이나 그런 것으로 뭉치게 되지, 거기에 테크닉까지 넣으려면 몇 년 정도 같이 해야 되요. 그러니 연습을 해도 써먹을 데가 없는 경우가 있었죠. 내가 연습해서 그룹에서 써먹으려면 오히려 그룹에 연습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었죠.
Q: 그러면 그 당시 그룹들에서 드럼을 연주하던 분들 사이에서는 어떤 분이 인정 받았나요?
- '동포'형(더 멘과 검은 나비에서 드럼을 연주한 문영배를 말함)과 배수연씨 등이 그때는 한참 날렸죠. 신중현 선생이랑 엽전들에서 했던 권용남씨도 있었고... 그런데 '필(feel)' 면에서 보자면 라스트 찬스에서 드럼 치던 한춘근씨 있죠. 나는 그 형이랑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는데 그때는 드럼을 참 잘 쳤어요. 이상한 걸 많이 하다 보니까 나중에 잘 안 풀렸지만...
Q: 그러면 대략 1972년 경 용궁다방에서 '하드'하고 '헤비'한 음악을 많이 접하고 1973~4년 경 미 8군 클럽에서 그런 스타일의 음악을 연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까 1974년경에 본격적으로 프로로 연주하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 그룹의 이름이나 연주 공간에 대해 말해 주십시오.
- 미 8군 클럽에서 연주한 다음에 뉴스 보이스라는 그룹을 했어요. 그때 같이 했던 멤버는 지금 신중현 선생 밴드에서 베이스 치는 김영진이 있었죠. 휘닉스같은 그룹에도 있었던 사람이죠. 그리고 키 보이스에 잠깐 있었던 이석렬이 기타 쳤고, 싱어는 전상규, 그리고 뒤에 H2O에 들어간 김화영이 건반을 치고 그랬어요. 연주 무대는 1974년 경 종로 2가에 이브(Eve)라는 곳이 있었어요. 그때 신중현 선생이 엽전들을 이끌고 일요일에 무대에 섰고 뉴스 보이스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무대에 섰죠. 이브는 춤추는 고고 클럽은 아니고 음악 감상실이었어요. 라이브 음악 감상하는. 뉴스 보이스가 한 1~2년은 지속된 그룹이었죠.
Q: 뉴스 보이스가 1~2년 지속되었다면 시기적으로 이른바 '대마초 파동' 이전으로 보입니다. 대마초 파동으로 그룹 사운드가 위축되는 분위기였는데 이 시기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 뉴스 보이스 말고도 1975년에는 명동의 섬씽(Something)이라는 곳에서 투 에이스와 바보들이라는 이름으로 일한 적도 있어요. 투 에이스는 오승근씨랑 홍순백씨가 하던 듀엣이고 거기에 (김)영진이가 베이스 치고, 내가 드럼 치고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곡같은 것들을 반주해 주었어요. 그리고 신촌의 티티카카, 종로의 가자가자 같은 곳과 부산 해운대, 대전 등지의 클럽들과 이태원 등의 기지촌, 또 미 8군 무대 등을 다녔죠. 나는 별 거 다했어요. 1973년경엔 쇼단에서 드럼 치면서 지방도 한 1년 돌아다닌 적도 있어요. '함 단장'이라는 분이 운영하는 쇼단인데 이대엽씨나 황해씨 같은 분이 있었어요. 이 분들이 '뻥'하고 액션을 하면 나는 드럼으로 '따당' 쳐주고 그러기도 했죠. 악단은 6인조 악단이었고 가수로는 샌디 김, 나나 시스터즈(웃음) 이런 사람들이 있었죠. 이런 일자리를 얻는 건 허리우드 극장 있는 낙원동에 가면 알음알음으로 소개해 줬어요.
Q: 그 당시 그룹 사운드들이 많이 연주하던 나이트 클럽 혹은 고고 클럽에서 연주한 적은 없으신지요.
- 왜요? 나이트 클럽에서도 많이 했죠. 센트럴호텔과 무겐 등의 나이트 클럽에서 일한 게 기억나고... 한때 템페스트에 들어가서 드럼 친 적도 있어요. 템페스트는 원래는 드럼 치는 유상봉씨가 리더였지만, 그 사람이 나간 다음에 제가 잠깐 있었던 적이 있죠. 한번은 신촌 카바레에서 나팔 부는 주백이형이라는 사람이 이끌던 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한 적도 있어요(웃음). 안 한 게 없다고 보면 되요.
Q: 그러면 그 뒤에 믿음소망사랑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시기적으로 다소 공백이 있어 보이는데...
- 1976년부터 1977년까지 방위로 군 생활을 하게 되었죠. 물론 중간에 땡땡이를 쳐서 남들보다 조금 오래했지만... 그때도 (최)구희랑 같이 많이 일하러 다녔어요.
Q: 최구희씨와의 만남에 대해 조금 상세히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최)구희는 1974년인가 그때쯤 만났어요. 그때 우리 앞방에 사는 후배가 나한테 기타를 배웠는데 얘가 고등학교(성남 풍생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밴드를 만들었어요. 거기서 기타 좀 치는 친구가 있어서 걔한테 내 이야기를 했는데, 그 친구가 나한테 기타를 배우고 싶어한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데리고 와 보라'고 그랬더니 바로 그가 (최)구희였던 거예요. 기타 쳐보라고 그랬더니 "미련" 같은 걸 치더군요. 그래서 내가 에릭 클랩튼, 산타나 이런 걸 쳐주었더니 껌뻑 죽더군요. 그래서 그때부터 나한테 기타를 배웠죠.
Q: 최구희씨는 그때부터 한국적인 정서에 관심이 많았는지요?
- 아뇨. 그때는 그런 건 생각 안 했고 그건 조금 뒤예요. 아무튼 구희가 음악적으로 번뜩번뜩하는 게 있었어요. 기타 솜씨도 금방 늘더군요. 그 전까지는 맨날 외워서 기타 치고 그랬는데 그때부터는 나름대로 곡도 쓰고 가사도 쓰고 그랬죠. 그때부터 (최)구희는 학교도 때려치우다시피 하고 나랑 같이 음악 하러 여기저기 다녔던 거죠.
Q: 믿음소망사랑에 대해 말하기 전에 1970년대 후반 한국의 록 음악의 상황에 대해 몇 개 여쭤 보겠습니다. 1976~7년경은 그룹 사운드 출신들이 이른바 '뽕짝 고고' 스타일의 노래를 불러서 히트했던 때입니다. 최헌의 "오동잎"이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같은 곡 말입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셨나요?
- 그런 거야 뭐 뻔한 거죠. 우리가 음악할 때만 해도 요즘처럼 자체제작을 할 수도 없고 제작자를 잡아야 되는데 제작자들이 음악적으로 무언가 시도해 보려고 하면 "이런 곡 말고... 상업성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하던 때였죠. 음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거죠. 그러니까 돌아가는 건 뻔한 거죠. 우리는 너무 뻔히 아니까... 한마디로 제작자들이 후진 거죠. 우리나라 음악계가 전반적으로 영세한 것이고.
Q: 그분들도 무대에서 연주할 때는 시카고나 산타나 같은 음악을 연주했다고 들었습니다만...
- 그렇죠. 그러니까 대학가에서 아마추어로 하는 게 아니라면, 일반 무대 쪽에 나오고 음반까지 취입하려면 어느 정도 겪고 나가기 때문에 그런 건 당연한 것이죠.
Q: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캠퍼스 출신인 산울림, 활주로, 블랙 테트라 같은 음악은 듣기에 어떠셨나요?
- 내가 보기에 산울림은 신선하고 창작력은 '오방'인데 연주 면에서는 조금 그런 수준이었죠. 산울림 음악은 아마추어적인 것이었으니까. 활주로나 블랙 테트라도 비슷했구요. 사실 그런 음악은 나하고는 별 관련이 없는 음악이었어요. 나 같은 경우는 연주인으로 나가는 중이었으니까 그런 음악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죠.
믿음소망사랑, 대천과 이태원의 밤을 지배하고 전인권과 최성원을 홀리다
Q: 그러면 믿음소망사랑으로 돌아와야겠네요. 결성된 시점이 언제라고 볼 수 있나요? 거쳐간 멤버라든가 연주했던 무대(업소)를 말씀해 주십시오.
- 1978년부터 구희와는 늘 붙어 다녔죠. 멤버는 조금 변동이 있었는데 김동환이 노래를 좀 했고, 베이스는 이환규가 맡았고, 기타는 조준형이라는 친구도 좀 했죠. 뒤에는 최효남이라는 친구도 기타를 쳤어요.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최)구희가 대천에서 방위로 군에 입대했어요. 그래서 대천에 내려갔죠. 거기 해수욕장 근처에 클럽이 있으니까 구희는 거기서 방위 받으면서 저녁에 일했어요. 대천에 있을 때는 조건이 숙식 제공에다가 그룹에 대한 월급이 80만원이었어요. 황당한 수준이었죠. 그래도 연습하기에는 너무 좋은 장소였어요. 낮에도 연습할 수 있고 밤에도 잼 같은 거 하고...
Q: 그러면 1982년에 발표된 믿음소망사랑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그때 만들어진 것인가요? 그랬다면 그때 작사나 작곡은 어떤 식으로 했나요?
- 그래요. "뛰어", "만남", "개척자" 같은 곡들이 그때부터 조금씩 써 두기 시작한 곡들이죠. 우리는 작곡할 때 악보를 그린 건 아니고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했어요. 악보를 쓸라면야 쓸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게 편하고 자유롭죠.
Q: (최)구희님은 어떤 기타리스트를 좋아했던 분인지요? 또 그 당시 사용했던 기타 모델이나 장비는 어떤 것이었는지요?
- (최)구희는 다른 기타리스트도 좋아했지만 제프 벡(Jeff Beck)을 특히 좋아했어요. 기타 모델이야 뭐 국산이고 장비도 20세기 앰프 썼어요. 1981년 첫 음반 녹음하기 전까지도 국산 썼어요. 그때만 해도 이펙트도 별로 없을 때인데 앰프가 후지니까 자연스럽게 디스토션 소리가 나오더군요(웃음).
Q: 1980년까지 대천의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하던 그룹이 1982년 봄에 데뷔 앨범을 발표하게 된 것은 이례적으로 보입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어떤 것이었습니까?
- 대천에서 2년을 보내고 1981년에 서울에 올라왔어요. 지금 도레미레코드의 사장으로 있는 (박)남성씨가 그때 준 프로덕션이라는 매니지먼트 회사를 하고 있었어요. 개그맨 김형곤이 거기 소속이었고 가수는 이명훈이 있었죠. 그때 박남성씨를 통해서 김형곤이 영화 찍는데 도와주기도 하고 잠시 나이트 클럽에서 일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록 그룹 쟁탈대회인가 경연대회인가 하는 행사가 있다고 박남성씨가 우리 보고 거기 나가라고 말하더군요. 연예협회 그룹 사운드 분실인가에서 주최한 대회였고 예선은 명동 마이 하우스인가에서 했고 본선은 잠실 학생체육관인가... 아무튼 잠실에서 했어요. 그때 심사위원이 신중현 선생이었어요. 믿음소망사랑은 "뛰어", "개척자" 같은 우리 곡을 가지고 연주했는데 신 선생이 그걸 잘 본 모양이에요. 그래서 작곡상도 받고 그랬죠. 그리고 나서 "야, 너희들 판이나 한 장 내라"라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신 선생 주선으로 킹박(주: 킹 레코드의 박성배 사장)을 만나서 1981년 겨울에 음반을 녹음하게 된 것이죠.
Q: 박남성 사장이라면 업계의 실력자로 유명한 바로 그 분이군요.
- 그 분은 유명한 분이죠. 그렇지만 음악은 잘 몰라도 감은 있는 사람이고 초기에 믿음소망사랑을 끌어 줬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죠.
Q: 신인 그룹이 녹음을 하는 것은 당시에도 여러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음반 표지를 보니 '장충 스튜디오'라고 나와 있는데 록 밴드가 녹음하기에 적절한 곳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 녹음은 장충 스튜디오에서 했죠. 그런데 거기 엔지니어가 "한 프로에 다 끝내야 돼. (연주가) 틀리면 아웃이야"라고 말하더군요. 살벌한 분위기였죠(웃음). 그래서 한 세 프로 썼나... 연주 한 프로, 노래 한 프로, 마지막에 땜빵 한 프로. (주: '프로'란 3시간 30분 단위의 레코딩 세션의 단위다).
Q: 그런데 앨범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홍보가 되지 않고 사장된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 신중현 선생이 우리를 킹박한테 소개시켜 줄 때 "너희들 계약 같은 건 하지 마라"라고 말한 일이 있어요. 그래서 계약도 하지 않고 음반을 내고 TV에도 [젊음의 행진]에 두세 번 나가고 그랬어요. 그때 우리는 석 달 동안 합숙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음반사에서 찾아와서 한 사람이 계약서라고 하면서 이따 만한 서류를 들이대더니 "계약하지 않으면 위자료 내라"고 말하더군요. 그렇게 겁을 주니까 우리는 합숙하다가 도망쳤어요. 그러니까 음반이 제대로 풀리지도 않은 것이죠. 김 샌 거죠. 그러더니 뒤에 동아기획에서 믿음소망사랑 2집 [夜](1988)가 나오니까 1집을 다시 찍어서 내더군요.
Q: 킹박이 제시하는 계약이 불평등한 조건이라서 신 선생이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보이는군요.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도망쳐서 어디로 가신 건가요? 그리고 최성원에 의하면 1982년에 이태원에서 믿음소망사랑이 연주하는 모습을 보았다는데 시간의 격차가 별로 없어 보입니다.
- 도망가서 다시 대천에 갔어요. 거기가 연습하기 좋았으니까. 그렇게 몇 달 있다가 다시 올라와서 이태원에 록(Rock)이라는 소극장 같은 공연장에서 연주했어요. 신중현 선생이 차린 곳이었어요. 1982년도인 것 같은데 그때 김혜정과 검은 장미라는 그룹에서 기타 치던 윤신호씨가 운영하던 검은 장미라는 카페가 있었고, 그 건물 지하에 전문 공연장이 있었어요. 거기서 그룹으로 연주할 때 (최)성원이랑 (전)인권이네가 와서 우리 연주하는 걸 보고 그랬죠. 록에서 우리랑 같이 연주했던 사람은 (김)태화형네 그룹인 뿌리, 그리고 록 음악 한다는 사람은 많이 왔어요.
Q: (최)성원님의 회고에 따르면 록이 자기가 연주하던 라이브(Live) 옆에 있었다고 하던데 사실관계가 맞는지요?
- 라이브는 록보다는 뒤에 생긴 곳이죠. 한 1985년인가... 그때 라이브에는 김도균이 이끌던 솔로몬, 하덕규가 이끌던 노란 잠수함 등이 있었어요. 그때 노란 잠수함에서는 (손)진태가 기타를 쳤죠.
Q: 빠뜨린 질문이 있습니다. 믿음소망사랑이라는 '기독교적' 이름은 누가 왜 지은 것인지요?
- 우리 그룹에 기타 치는 후배가 하나 더 있었어요. 최효남이라는 친구인데 이 친구도 템페스트에도 있었고 군대 가기 전에는 지미 헨드릭스 스타일로 기타를 참 잘 쳤죠. 군대 갈 때도 '나중에 그룹을 꼭 같이 하자'라고 약속을 했고 제대해서 합류를 시켰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그런 사람이 꽤 있는데 군대 들어가서는 기독교에 푹 빠진 거예요. 그러더니 그룹 이름을 할렐루야로 하자고 그러더라구... '그건 너무하지 않냐'라고 해서 조금 약한 이름으로 정한 게 믿음소망사랑이었죠. 최효남은 뒤에 그룹에서 나갔고 조준형이 들어왔죠.
Q: 그때 연주했던 곡은 주로 어떤 곡이었나요?
- 보스톤(Boston)의 "More Than a Feeling", 이글스의 "Take It Easy", "New Kid in Town",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 블랙 사바쓰의 "Wicked World", "She's Gone" 같은 거 했죠. 우리는 기타가 두 명이니까 다른 그룹이 하기 힘든 것도 곧잘 하곤 했죠. "She's Gone" 같은 경우는 원래는 어쿠스틱 기타로 하는 것이지만 나름대로 편곡을 해서 바이올린 주법으로 해서 넣기도 하고 그랬어요. 1970년대는 원곡이랑 똑같이 많이 했는데 그때 우리는 뭔가 좀 색다르게 하려고 노력을 했죠. 업소 주인인 신중현 선생도 "될 수 있으면 창작곡 해라"라고 그래서 창작곡도 많이 했죠. 그래서 몇 번은 록 뮤지컬도 우리가 직접 만들어서 하고 그랬어요. 그걸 보고 인권이네랑 성원이네가 뻑 갔던 거죠. 만들어져 있는 작품을 한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서 했어요.
Q: 음반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믿음소망사랑의 보컬을 맡은 김동환님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 그리고 보컬리스트로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 앞에서 말한 종로 2가의 이브라는 곳에서 일할 때 동환이도 거기서 통기타 치고 노래 불렀어요. 팝송을 주로 불렀는데 "Wild Flower" 이런 거 했어요. 뒤에는 나이트 클럽에서도 일했고 죽은 (김)현식이랑 듀엣도 하고 그랬을 걸요.
들국화가 찬란히 꽃 피울 때 뒤에서 북을 치다
Q: 이제 문제의 들국화 이야기로 넘어가게 됩니다. (최)성원님이 무슨 말로 들어오라고 꼬셨나요?(웃음)
- 아니 들어오라고 그런 건 아니에요. 성원이, 인권이네 그룹이 나름대로 색깔은 있었지만 록적인 그룹이 아니고 선배도 민기형 이런 분들이었죠. 라이브라는 클럽에서 할 때까지만 해도 록적인 팀은 아니었어요. 나름대로 색깔은 있었지만. 록적인 음악이 아니고, 드럼 연주도 그렇게 중요한 그룹이 아니니까 나로서는 좀 그랬죠. 그래서 들국화 음반에는 녹음할 때만 세션으로 참여한 거예요. (최)구희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서울 스튜디오에 가서 몇 번 맞추어 보고 이제 곡 좀 알겠다고 하니까 그만 하라고 그러더라고요. 시간 다 지났다고.
Q: 그래도 그 뒤에 공연부터는 정식 멤버로 참여하신 것으로 아는데...
- 그때 최구희는 괴짜들 한다고 그러고 그룹(믿음소망사랑)에서 내분이 있어서 그룹이 깨지고 그래서 그룹 깨지면 멍청해지잖아요? 그러고 있는데 들국화 음반 내고 공연을 해야 되는데 드럼 없이 공연하기는 그렇잖아요?
Q: 그래도 세션을 전문으로 하는 드러머도 많았는데 (주)찬권님을 드러머로 데려온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 그건 뭐 내가 세션으로 닳고 닳은 사람이 아니라 그룹 쪽에서 오래 한 사람이니까 그런 걸 바랬던 것이겠죠. 아무튼 들국화 1집 녹음할 때는 드럼만 따로 연주한 것도 아니고 합주하면서 녹음했는데 나는 제대로 치지도 못하고 "이제 대충 곡을 알겠는데..."했는니 "됐는데, 뭘" 하더라구요(웃음).
Q: 그러면 한 예로 "행진"에서 처음에는 톰톰만 쓰다가 코러스에 들어가서 스네어를 치는데 이런 건 주찬권님의 아이이더였던 건가요? 아니면 들국화 다른 멤버 분들이 주문한 것이었나요?
- 그것도 스튜디오에서 몇 번 이렇게 해보자 하다가 그냥 그렇게 간 거예요. 오래 생각하고 이것저것 해 보고 해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들국화 1집 녹음할 때도 드럼은 한 프로나 두 프로에 끝났어요. 요즘은 드럼 녹음에 프로를 되게 많이 쓰는데 그때는 요즘과는 많이 달랐죠.
Q: 들국화에 주찬권님이 없었으면 '록 음악'으로 들렸을 것 같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글쎄요. 나름대로 해 나갔으리라고 생각합니다.
Q: 1집을 녹음하면서 조덕환님이 탈퇴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찬권님은 들국화의 정식 멤버가 아니었는데 당시 어떤 견해 차이로 탈퇴한 것인지요?
- (조)덕환이는 개인적인 취향이 좀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덕환이는 당시에도 미국으로 이민갈 계획이 이미 있었고... 내 기억에 덕환이는 녹음과정에 많이 참여하지를 않았어요. 노래는 몇 곡 부르고 "세계로 가는 기차"에서 리듬 기타를 쳤고 "축복합니다"에서 어쿠스틱 기타 치고... 그 정도. (조)덕환이도 '기타잽이'는 아니죠. 음악 좋아하고 곡 잘 쓰고 그런 친구였죠. 뭐, 자세한 건 자신만이 알겠죠.
Q: 그렇다면 주찬권님이 들국화 정식 멤버로 된 것은 언제부터라고 할 수 있나요? 그리고 라이브 앨범에서는 손진태님이, 2집 음반에는 최구희님이 각각 정규 멤버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지만 정리 좀 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 내 경우는 크리스탈 백화점에서 공연할 때부터인가... 아니 그 전에 몇 군데에서 조금씩 공연을 하고 다녔는데 그때부터예요. 처음에는 기타 없이 공연하다가 내가 (최)효남이를 데리고 와서 크리스털 백화점 공연에서는 (최)효남이가 연주한 적도 있어요. 그 뒤에 (허)성욱이가 (손)진태를 소개해서 일단 진태에게 기타를 치게 했죠. 라이브 앨범 녹음이 1986년 5월 5일 어린이날 했으니까 그때는 손진태가 기타를 연주했죠. 그런데 녹음 끝나고 서강대 축제에 나가려고 하는데 그 무렵에 괴짜들이 깨진 거에요, 그래서 (최)구희 보고 들국화에 와서 기타 좀 쳐 달라고 부탁해서 문화체육관 공연부터 같이 하게 되었고 2집 녹음도 같이 하게 되었죠. 그러니까 (최)구희는 들국화 1집 녹음할 때는 순전히 세션으로 참여한 것이었고, 괴짜들을 하려고 들국화를 떠난 거죠.(주: 이 부분은 김동환 등 믿음소망사랑의 잔여 멤버와는 견해가 다소 달랐다^^).
Q: 들국화 1집을 녹음하고 이 음반이 그 정도로 '뜰' 것이라고 예상했나요? 주찬권님 본인이나 주위 분들의 기대감 같은 게 있었나요?
- 나는 그런 건 전혀 몰랐고 뜨고 안 뜨고는 생각에 두지도 않었어요. 계속 음악할 수 있으면 좋은 거다 그런 생각이었어요. 성원이나 인권이는 그런 게 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잘은 모르겠어요.
Q: "우리의 소원"을 건전가요로 넣은 것이나 멤버가 아닌 이병우의 곡 "오후만 있던 일요일"을 녹음하기로 한 것 등은 누구의 아이디어였나요?
- 그건 모르겠네요. 그런 건 (최)성원이가 잘 알 거예요. 음반의 디렉터 역할은 성원이가 많이 했으니까.
Q: 예상과는 달리 1집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2집의 경우는 어땠나요?
- 솔직히 2집은 얼치기로 만들었어요. 그때 우리가 공연을 무지하게 했잖아요. 공연 끝나고 피곤한 상태에서 강남에 있는 한국음반 스튜디오에 가서 녹음하고 그랬어요. 한참 공연을 할 때니까 작사나 작곡을 할 시간도 없고 성원이가 만든 곡도 그렇지만 내가 만든 곡들도 옛날에 만들어 둔 곡들이지 새로 만든 건 없어요. (최)구희의 곡인 "행복한 마음" 경우도 신곡이 아니라 예전에 서라벌에서 믿음소망사랑으로 우리끼리 녹음한 적이 있는 곡이죠. (전)인권이가 새 곡을 만들었지만 스튜디오에서 급히 맞추다 보니 결과가 잘 나오지 않은 것 같아요.
Q: 혹시 최성원님의 팝 감성과 최구희님의 한국적 감성이 잘 맞지 않는 적은 없나요?
- 다 안 맞았어요(웃음). 안 맞으니까 멋있는 거 아닌가요? 다양한 요소가 다 있으니까 얼마나 재미있어요? 그렇지만 속에서는 골 때리는 일이 많았죠. 그래서 결국은 깨졌죠. 깨질만 하니까 깨진 거죠. 그렇지만 그룹을 해 나간다는 일은 무조건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모여서 음악을 한다는 게 위대한 거죠. 사실 이 정도 한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고,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욕심인 것 같아요.
Q: 들국화 시절에 대해 몇 가지 더 여쭤보겠습니다. 동아기획 김영 사장이나 동아기획 소속 음악인들 중 가장 선배였던 조동진님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나요?
- 김영 사장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은 분이었죠. 그 판에서는 그래도 음악이라도 들을 줄 알고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라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보통 프로덕션 차리는 사람들이 음악을 모르는 사람들인데... 잘 알잖아요?(웃음). 그리고 조동진형은 정신적인 지주였죠. (조)동진형은 만나서 함께 지내보면 알지만 참 좋고 무언가가 있는 사람이에요. 그 형이 사회적으로 활동을 하지 않아서 그런 게 나오는 것 같은데... 아무튼 동진형님 같은 사람은 꼭 있어야 되요.
Q: 들국화 공연도 동아기획에서 모두 기획한 것인가요? '우리 모두 여기에' 같은 연합 공연은 동아기획에서 기획한 것으로 압니다만...
- '우리 모두 여기에'는 동아기획에서 한 공연이고 들국화 공연도 김영 사장이 몇 번 했죠. 그렇지만 다른 분들도 많이 했어요. 이백천 선생도 한번 기획한 적이 있고 다른 기획자들도 많이 했죠. 1989년의 '아듀 들국화' 공연은 들국화가 해체된 다음인데 어떤 사람이 "돈 몇 천 만원 줄 테니까 지방 한번 돕시다"라고 해서 한 것이고...
Q: '돈 이야기'를 물어봐도 될까요? 들국화가 공연을 많이 하면서 무척 바쁘고 피곤했을 텐데 공연으로 인해 수입은 괜찮아지신 건가요? 1, 2집 음반도 몇십 만장은 팔렸을 것 같고...
- 전혀 그렇지 않아요. 김영 사장도 짜장면 한 그릇 가지고 벌벌 떠는 사람이었어요(웃음). 하긴 김영 사장만 그러겠나요. 이게 참 우리나라에서 음악 하면서 살려면 상업적인 음악을 딱 해서 정상에 오른 다음 먹고 살만큼 돈을 벌지 않는다면 다 뭐 인디 밴드 하는 거나 똑같죠. 요즘 인디 밴드 하는 애들 봐도 집에서 돈 타다 쓰는 것이지 음악해서 생활하는 애가 어디 있겠어요.
들국화, '꽃이 시든 후에도...'
Q: 이제 들국화 이후의 일을 물어보겠습니다. 들국화로 성공한 다음부터는 '업소'에는 많이 나가시지 않게 된 것 아닌가요?
- 들국화 이후에는 춤추는 데 가서 연주하는 일은 안 했죠. 그런데 사실 어떤 면에서는 들국화로 이름이 난 게 더 안 좋을 때도 있어요. 차라리 무명이면 아무 데나 가서 음악 편하게 하고 그것으로 생활하고 즐기면 되는데, 조금 이름이 나니까 아무 데나 가서 하게 되지도 않더군요. 이름 갈아야 되겠어요. 가명 하나 지어서(웃음). 그런데 그런 건 있어요. 나이 먹어서 생각해 보니까 만약 나한테 돈이 있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더러워서 음악 안 했을 것 같아요. 그냥 놀러 다니기나 했겠죠. 돈이 없으니까 그래도 음악 하려고 하지, 돈 있었으면 이런 바닥에서는 음악하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음악은 정말 하고 싶고 음악은 정말 좋은데 그게 일이랑 연관되면 더러운 일이 많잖아요? 그래서 음악과 관련된 일은 하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먹고 살만큼 돈이 있었으면 음악 안 했을 거예요.
Q: 참 아까 신중현 선생과 마산 로얄 호텔에서 일하셨다고 말하셨는데 그건 언제 일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그때 신중현 선생의 그룹 이름은 무엇이었고 얼마 동안 일했고 레퍼토리가 어떤 것이었는지도 궁금합니다.
- 1987년 마산 로얄 호텔에 가서 한 6개월 했어요. 그 전에 1983년인가 신중현과 세 나그네라는 걸 한 적이 있죠? 뮤직 파워 다음에. 그때 신 선생이 (이)남이형이랑 동포형(문영배)이랑 같이 했는데 동포형이 그만 둬서 내가 잠시 드럼 친 일도 있어요. 그리고 이태원의 라이브와 록 월드에서 할 때도 같이 많이 지냈죠. 중간에 성남과 강남에서 일도 같이 하고. 그러고 나서 1987년에 신 선생이 마산에 일이 있다고 같이 가자고 하시더군요. 마침 들국화도 거의 깨진 상태도 (전)인권이랑 (허)성욱이도 무슨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신 선생 그룹으로 가게 된 거죠. 그때 그룹 이름은 좀 골 때렸죠. 신중현과 세계일주. 연주 레퍼토리는 주로 신 선생 곡을 했고 가끔 외국 곡도 몇 곡 하더라고요. 독일 그룹 곡이었는데 제목은 기억이 안 나네... 디스코 계통의 곡이었는데 그렇게 천한 음악은 아니고 괜찮은 곡이기는 했어요. 신 선생은 재미있어요. 좋아요. 대장 기질이 있는 사람이죠. 어떨 때 가끔씩은 컵이 날라오기도 하지만(웃음).
Q: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주)찬권님이나 (최)구희님은 '신중현 계보'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덧붙여서 뉴스 보이스에서 같이 연주한 김영진님이 지금은 신중현 선생의 밴드에서 연주하고 있고, 1970년대에는 심형섭님이 이끌던 휘닉스에 있었던 그 분이 맞나요?
- 맞아요. 나하고 (최)구희는 그쪽이에요. 엽전들의 한국적 록의 영향이 크죠. 음악 들어보면 알잖아요? 그리고 김영진이는 나와 동갑이고 휘닉스했던 것도 맞아요. (심)형섭이 형도 우리가 이브에서 뉴스 보이스로 연주하는 것을 보러 온 적도 있어요. 나이가 우리보다는 조금 많은 분이었는데...
Q: 들국화 이후 믿음소망사랑을 재결성하고 솔로 앨범도 계속 발표하셨습니다. 믿음소망사랑 2집과 솔로 1집은 동아기획에서, 2집과 3집은 아세아에서 발표했는데 동아기획에서 아세아로 소속을 옮긴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 동아기획과는 원래 믿음소망사랑 음반을 두 장 내기로 계약했어요. 그래서 믿음소망사랑을 재결성해서 [夜]를 녹음했는데 한 종 내고 애들이 가 버렸어요. 그래서 그 대신 솔로 1집을 녹음해 준 것이죠. 그때도 모든 걸 거의 혼자 작업해서 많이 힘들고 지치고 돈도 없고... 그래서 아세아랑 음반 두 장을 계약해서 2집부터 냈죠. 거기도 엉망이었죠. 좌우지간 그때 일들은 모든 게 엉망이었어요. 조금 나은 게 1999년의 4집 음반 정도죠.
Q: 솔로 1집 음반 경우는 드러머의 음반이라고 하기에는 드럼 소리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미디로 찍은 느낌도 들던데 맞는지요? 또 그랬다면 어떤 이유였는지요?
- 그때 녹음한 예성 스튜디오는 (이)장희형 동생인 이승희가 충무로 대한극장 뒤에 차렸던 녹음실이에요. (이)승희와는 친하게 지냈는데 여기는 광고음악 같은 거 하는 녹음실이었고 (강)근식형이 하던 강 프로덕션과 일을 나누어서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거기는 광고음악 정도 녹음하는 스튜디오니까 드럼 세트도 없는 곳이었어요. 그래서 미디로 찍어서 했죠. 250만원 가지고 음반 한 장 다 녹음한 거예요. 프로도 많이 못 썼고. 이유야 뭐 아까 말한 대로 믿음소망사랑이 깨져서 두 번째 음반을 녹음할 수 없으니까 음반을 녹음할 돈이 충분히 없어서 그런 거죠.
Q: 주찬권님은 다른 드러머들처럼 녹음 세션에 많이 참여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보통 녹음 세션에 참여하면 웬만큼 먹고 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일을 많이 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 제가 추구하는 게 세션 쪽이 아닙니다. 세션을 전문으로 하려면 여러 가지 기술적인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하는데 저는 제 음악을 위한 시간을 갖길 원하구요. 저는 돈을 벌려고 음악 하는 게 아니고, 음악하기 위해 생활하려고 돈이 필요한 거니까.
Q: 이건태씨 같은 경우는 드럼 레슨을 본격적으로 시도하는 것 같습니다. 그 분 말씀이 "한국에서는 개성이 강하면 살아남기는 힘들고 이것저것 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 이건태씨가 그래요? 그런 부분들이 있긴 있네요.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걸 보면 그런 게 있는 거네요. 하긴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음반만이 아니라 공연을 해도 자기 맘대로 하지 못해요. 음향도 엉망이고 음악적인 것도 그렇고... 시키는 대로 잡혀서 하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자기 맘대로 하면 뭐라고 그럴 때가 많죠.
Q: 주찬권형은 세션맨으로 빠지지 않고 자기 음악을 전개하려고 한 분으로 보이는데 그 길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 그러니까 거지잖아요?(웃음). 클럽 만들어서 뭔가 해보려고 하다가 계속 망했어요. 앞으로는 드럼 레슨을 다시 해 볼까 해요.
깨지고 모이고 다시 깨지고 다시 모이고?
Q: 들국화 멤버들의 솔로 앨범들에는 세션으로 참여하신 음반들은 꽤 있습니다. 보통 밴드가 깨지면 얼굴도 안 보는 경우도 있는데 들국화 경우는 인간관계는 유지하면서 지내시는 것 같습니다.
- 기본적인 건 있는 사람들이니까 기본적인 인간관계까지 깨지는 않죠. 그룹으로, 밴드로 같이 할 때 하도 싸워서 그렇지. 그렇지 않으면 다 친구들이죠. 그러니까 솔로 앨범 낸다면 세션에는 참여하는 것이죠. 그런데 1990년대 이후에는 솔로 앨범에도 많이 참여하지 않았어요. (전)인권이의 이번 솔로 앨범에도 나는 안 했어요. 그건 뭐 (전)인권이 솔로 작업이니까.
Q: 1995년에 나온 들국화 3집 앨범은 실질적으로 전인권님의 솔로 앨범이었습니다. 드럼도 이건태씨가 참여했는데... 그 음반 나온 거 보시고 소감이 어떠셨나요?
- 나는 뭐 별 상관하지 않아요. 그때 (이)건태씨랑 (전)인권이랑 싸웠다는 이야기만 들었어요(웃음).
Q: 자연스럽게 들국화의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가서 마무리하겠습니다. 1998년 KBS 홀 공연에서는 손진태씨가 기타를 연주했고 2000년 예술의 전당에서 했던 공연에서 최이철씨가 기타를 연주했는데 들국화는 늘 기타리스트 문제로 골치가 아파 보입니다. 또 허성욱이 없다 보니까 (최)성원이 베이스와 키보드를 번갈아 가면서 연주하기도 하던데...
- 들국화는 원래 리드 기타 없이 하던 그룹이니까 몇몇 곡은 기타 없이 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어요(웃음). 저번에는 (최)성원이가 키보드만 치고 했잖아요? (최)성원이도 키보드를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니지만 자기 곡이니까 코드 찍어가면서 한 거죠. 곡을 아니까 다른 사람이 하는 것보다는 낫죠. 이철이형은 2000년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하기 전에 들국화가 미사리 카페에서 밤일을 했는데 그때 같은 곳에서 했어요. '시간을 잊어버린 마을'인가... 그때까지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는데 그때부터 친해졌고 공연도 같이 하게 되었죠.
Q: 들국화와 사랑과 평화의 음악은 매우 이질적으로 보이는데 공연 준비하면서 별 문제는 없었나요?
- 들국화랑 사랑과 평화는 전혀 안 맞죠(웃음). 그런데 들국화는 원래부터가 전혀 맞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하던 그룹이에요, 알잖아요? (주: 최이철은 지난 인터뷰에서 "들국화 곡에서 기타 연주하는 게 좀 심심하지 않았느냐?"라고 물으니까 "맨날 훵키한 음악만 하다가 오랜만에 1970년대 스타일의 장대한 록 음악을 연주하니까 좋더라"라고 말한 바 있다).
Q: 그 무렵부터 들국화의 새 음반을 낸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왔는데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계획이 있는 건지요?
- 음반이야 뭐 나와야 나오는 거죠(웃음). 성원이가 곡을 써야 나오는 건데... 사실 "그것만이 내 세상", "매일 그대와", "제발" 이런 정도의 곡이 나와야 하는데... 솔로 앨범이면 모르겠지만 들국화 음반 같은 경우는 그냥 막 낼 수도 없고. 좋은 곡이 나와야 되겠죠.
Q: 그 곡들은 198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1990년대를 보내면서 써둔 곡 같은 게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최근 만나 뵈니 "두문불출하고 곡 쓰고 있다"는 게 공식 입장이더군요. 주찬권님도 솔로 앨범에 담긴 곡들을 들국화 멤버들과 함께 연주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덧붙여 들국화는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여쭤 봅니다. 또다시 '깨진' 상태인가요?(웃음)
- 1990년대에 (최)성원이는 패닉의 음반 등을 제작하느라 바빴을 거고... 그리고 사실 '밑반찬'할 곡들은 많이 있죠. 그런데 뭔가 뻥 터질 만한 게 한두 곡 있어야 되는데 그게 그렇게 쉬운 건 아니죠. (최)성원이가 두문불출하고 곡 쓰고 있다고 하니까 무언가 나와도 나오겠죠. 들국화는 깨진 것은 아니구요, 앨범이 나올 때까진 활동을 좀 쉬기로 한 상태입니다. 그동안 공연도 많이 했고, (전)인권이의 솔로 활동도 있고 해서...
Q: 2001년에는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백기완 선생의 [통일, 그날 음악회]에 '아다마'로 들국화가 참여했습니다. '운동권' 행사인데 들국화와 운동권의 관계는 어떤 것이라고 보는지요? (전)인권이형은 양심수 석방을 위한 콘서트에도 곧잘 참여하고 시인 김정환과도 절친하다고 들었습니다만... 질문의 요지는 들국화의 음악에 1980년대 운동권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음악을 받아들이는 사람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요. 그렇다고 거기에 동참할 생각은 별로 없어요. 들국화 자체가 그런 쪽이 아니라는 건 알잖아요? 들국화는 히피 쪽이죠. 운동권에서 "행진"이나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같은 곡을 좋아했다면 들국화의 곡이나 가사가 폭이 넓어서 그런 것이겠죠. 곡을 잘 쓴 것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여기저기랑 매치가 잘 되는 것이겠죠.
Q: 요즘 젊은 후배 밴드들 가운데 괜찮다고 생각하는 밴드는 있는지요?
- 솔직히 말해서 좀 '그만 그만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2000년경에 신촌 연대 앞에 '행진'이라는 이름으로 라이브 클럽을 하다 망했는데, 그때 인디 밴드들 중 괜찮은 밴드 있으면 공연도 시켜 보고 음반 제작도 해보려고 했는데 뭐랄까 '뻥'하고 팍 터지는 게 없더라구요. 연주도 그렇고, 메시지도 그렇고... 하긴 그만그만한 밴드가 양적으로 많은 것도 필요하지만 내 성에는 좀 차지 않더군요.
Q: 여러 말씀 감사합니다. 자주 연락 드리겠습니다.
- 그래요. 메일 한 번 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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